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公益人間/쓴 글

초인을 기다리지 않는 옥천의 주민자치

by 제갈임주 2014. 3. 28.

초인을 기다리지 않는 옥천의 주민자치

 - 안남면을 중심으로 -

 

제갈임주(풀뿌리자치연구소 이음 연구위원)

 

인터뷰 : 황민호 (마을연구소 안남 연구원 / 전 옥천신문 편집장)

 


‘원주’하면 떠오르는 장일순 선생처럼 세상에 널리 이름 난 인물도 없다. 오랜 시간 함께 하며 마을의 사상적 기반을 이룬 풀무학교 같은 구심도 없다. 특별할 것 없는 주민들의 공론장에 기대어 자치의 길을 개척해 온 옥천의 이야기는 그래서 도리어 특별하게 다가온다. 그 특별함에 누구보다 많은 애정을 지닌 사람, 2002년 옥천신문사에 입사해 10년간 안남면 취재를 맡아 주민과 호흡을 함께 한 황민호 기자를 통해 옥천과 안남의 역사를 돌아보고자 한다. 

 

 

                                           황민호 (마을연구소 안남 연구원/전 옥천신문 편집장)


Ⅰ. 안남면과 옥천군의 주요 단체

 

●옥천신문(1989.9.30)
1989년 창간된 옥천신문은 주민의 목소리를 내는 신문을 만들겠다는 사람들의 염원을 담아 2백 명 군민주를 모아 창간한 신문이다. 여야 수구세력보다는 새로운 정치 세력을 갈구하는 사람들이, 면민보다는 읍내 사람들이 많이 참여했다. ‘안티조선운동’으로 불리는 조선일보 절독운동을 활발히 전개했으며 그 영향으로 현재 옥천의 조선일보 구독 가구 수는 5백 세대를 넘지 않는다. 그러나 옥천신문의 유가 발행부수는 4천 부(옥천군 인구 2만 2천 세대)라 하니, 지역 내 옥천신문의 위상이 어떤지 가히 짐작이 된다.

 

●옥천군 농민회(1990.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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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 창립한 농민회는 옥천군 아홉 개 읍면 중 안남면과 안내면, 두 개 지회로 시작했다(지금은 청성면까지 3개의 지회가 있다). 초기 활발한 운동을 벌이다 지금은 약해진 인근 지역 농민회와는 달리 옥천군 농민회는 현재까지 활동을 이어오고 있으며 특히 지역에 대해 많은 고민을 했다. 농민회를 이끌었던 몇몇은 지역으로 나와 동네 변화를 위한 활동을 펼쳤으며 도서관, 어머니학교, 지역발전위원회, 옥천살림 등에서 주요한 역할을 맡고 있다. 

 

                                             옥천군 농민회 회의 (출처:www.facebook.com/iminho75 

 

●대청호 보전운동본부(2002.4.11)
2002년 4월 출범한 대청호 상・하류 지역의 민관협력(거버넌스) 기구다. 주민들은 수자원공사가 독점적으로 운영하는 대청댐과 관련해 자신들의 목소리를 내기 위해 참여했다. 천안・청주・대전・무주・금산・영동・옥천・보은 8개 지역의 네트워크와 정부(금강유역환경청), 수자원공사, 지방자치단체가 함께 참여해 대청호 보존활동과 정책연구활동, 상하류 주민의 교류사업을 10년간 지속해 왔다. 8개 지역 중 옥천 네트워크에는 대청호주민연대를 비롯해 옥천흙살림, 환경사랑모임과 회원마을, 옥천군이 참여하고 있다.

 

●안남면 주민자치센터(2002.4.24)
김대중 정부 때 도입된 주민자치센터가 옥천에서는 안남면에 최초로 지어졌다. 2001년 안남면이 주민자치센터 시범실시 면으로 지정되고 이듬해 4월에 센터가 문을 열었다. 당시 농민회 대표였던 주교종 씨가 초대 사무국장을 지낸 이후 안남의 주민들은 주민자치센터의 틀 속에서 자치의 실현을 시도해 왔다. 주민자치위원회와 어머니학교, 초등학생, 민예총 등 지역의 여러 단체가 함께 기획하고 진행하는 작은 음악회는 지난해로 열 번째 생일을 맞았다.

 

●안남 어머니학교(2003.2.25)
 ‘<안남 어머니학교>는 안남면에 자리한 문해교육기관으로 가난과 남녀차별, 생계 등의 이유로 배움의 기회를 놓친 학습자들에게 자신의 삶을 되찾고 지역사회에 참여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기 위해 설립되었다.’(이음, 「달팽이가 달리기를 시작한 까닭은?」 154p.) 옥천군 농민회의 창립멤버이자 사무국장과 회장을 지낸 송윤섭 교장의 제안으로 시작된 어머니학교는 어릴 적 글을 배우지 못한 어머니들 마음의 한을 달래며 10년의 역사를 이어왔다. 벽에는 어머니들의 고달픈 삶의 자국이 담긴 시들이 전시되어 있다. 어머니학교는 안남면 주민자치센터 2층에 자리 잡고 있다. 


●대청호주민연대 (2005.4.8) 
 

대청호 상류지역 주민들의 연대기구다. 금강 상수원 수질 개선을 위해 대청호 상류지역 주민들에게 정부가 개인 부담으로 오수처리배출시설을 갖출 것을 요구하자 주민들이 이에 반발해 스스로의 권익을 지키기 위해 만든 단체이다. 대청호주민연대 정관에는 ‘상류지역 주민의 자발적 참여로 스스로의 권익을 도모’하는 것뿐만 아니라 ‘대청호 상류지역의 환경보전과 중・하류지역 주민과의 친환경적인 생활운동을 전개하여 더불어 사는 대청호 공동체 건설을 목적으로 한다’고 명시되어 있다. 이에 따른 활동으로 대청호 정화활동과 환경교육, 골프장 건설 반대 운동 등을 펼쳐왔으며 옥천에 사무실을 두고 있다. 

◀ 사진: 페이스북-황민호(www.facebook.com/iminho75)

 

●풀뿌리 옥천당 (2005)
풀뿌리 옥천당은 옥천신문 오한흥의 아이디어로, 뜻을 같이 하는 사람들이 모여 2006년 지방선거를 앞두고 만들었다. 아직 우리나라에는 지역정당 설립에 관한 법적 근거가 없어 창당 자체가 불가능했지만, 중앙 거대정당에 대한 불신을 갖고 지역정당을 고민하던 사람들에게 많은 관심과 지지를 받았다. 지역에서는 그리 확산되지 못한 반면 외부로 널리 알려졌으나 정당법 위반 혐의로 기소돼 벌금형을 선고받는 등 어려움을 겪었다.

 

●옥천 배바우 청정마을 정보화센터 (2006.4.24)
‘배바우’마을은 안남면에서 가장 큰 자연 마을로, 2006년 행정자치부(현 안전행정부)의 정보화마을로 지정됐다. 안남면 주민들은 정보화 마을 정책을 활용해 온・오프라인으로 지역의 친환경 농산물을 팔아 수익을 올렸다. 2010년에는 충청북도의 우수 정보화마을로 선정됐고, 2012년에는 배바우 청년회가 수년간 운영해 온 도농교류체험 프로그램 및 농산물 직거래 장터 운영의 성과를 인정받아 안전행정부 마을기업 육성사업 대상으로 ‘배바우 지역홍보와 장터 운영사업’이 선정됐다. 이로 인해 받은 5천만 원의 지원금으로 ‘안남 이야기터’라는 상설 농산물 홍보・판매장을 설치하고 30년 전 사라진 ‘배바우장터’를 복원했다. 버스를 타고 읍내나 대전까지 나가 농산물을 팔던 농민들은 이제 가까운 동네에서 사고팔 수 있게 됐다. 배바우 장터는 매월 넷째 주 토요일 안남면사무소 앞 생태광장에서 열리며 지역화폐 ‘배바우’로 거래한다.

 

●안남면 지역발전위원회 (2006.10.30)

안남면 지역발전위원회는 면 단위 주민협의체로 안남면의 중요한 문제는 거의 이 곳에서 결정된다. 위원은 총 36명으로, 12개 마을 이장과 주민이 추천한 12명의 마을위원, 그리고 이 24명이 뽑은 마을 일꾼 12명으로 구성돼 있다. 

지역발전위원회는 ‘주민지원사업비’의 사용처를 논의하는 과정에서 만들어졌다. 금강수계 하류 지역 주민에게 걷은 물이용부담금으로 재산권 행사에 제한을 받는 상류지역 주민에게 지급하는 ‘주민지원사업비’는 지역발전위원회가 생기기 전에는 주로 개별 가정에게 냉장고나 에어컨을 사 주는 등 주먹구구식의 선심성 예산으로 쓰였다. 잡음이 그치지 않는 이 눈먼 돈을 각 가정이 받아쓰는 대신, 한데 모아 안남면의 발전을 위해 사용하기로 합의한 주민들은 지원사업비 일부(15%, 1억 5천만원)를 주민공동사업비로 정해 용처를 결정하고 실무를 맡아 진행할 단위로 ‘지역발전위원회’를 구성했다. 

 

지역발전위원회에는 이장, 주민자치위원뿐만 아니라 새마을부녀회, 자율방범대, 의용소방대, 주부, 농협과 공무원까지 여러 사람과 단체가 참여한다. 투표를 통한 직접 선출은 아니지만 주민을 대표해 일하려는 사람들은 거의 모였다고 볼 수 있다. 월 1회 회의를 열고, 격주로 운영위원회 교육을 한다. 모임과 회의 결과는 3천 부 무료 배포되는 배바우 신문을 통해 면민에게 공지된다. 모임은 열려 있어 누구라도 방청이 가능하다.

 

지역발전위원회가 출범한 후 가장 먼저 한 일은 지역의 종합발전계획을 세운 것이다. 외부기관-(주)이장과 <지역농업네트워크>-의 도움을 받아 지역의 농업과 농촌을 설계할 때 그들은 매주 도서관에 모여 회의하고 계획을 세우는 강행군의 일정을 소화해냈다. 그러나 당장 눈에 보이지 않는 일에 돈 쓰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주민들 사이에서는 “아까운 돈 가지고 뭐하는 거냐?”는 볼멘소리도 새어나왔다. 지역발전위원회는 계획을 현실화해야겠다는 생각에 농림축산식품부의 ‘농촌마을종합개발사업’에 응모했고, 두 번의 실패를 거쳐 대상권역으로 선정됐다. 이 사업은 ‘산수화권역 추진위원회’에서 맡아 진행하고 있으며 5년간 50여억 원의 기금이 지원된다.
 
●옥천군 농업발전위원회 (2006.11.9)
옥천군 농업발전위원회는 옥천군의 농업예산을 논의하는 농정자문 거버넌스 기구다. 안남면 농민회를 주축으로 한농연, 한여농, 4H, 농민연구회, 친환경농민회 등 지역의 여러 농민단체가 참여하고 있으며, 군의원, 농협관계자 및 군수를 포함한 공무원 25명으로 구성돼 있다. 농업발전위원회는 ‘농업정책을 더 이상 관료들의 손에만 맡길 수 없다’는 농민들의 문제의식에서 출발해 군청 앞에서 깃발을 들고 싸우는 5년의 지난한 세월 끝에 얻어낸 결실이다. 농발위 발족 후 다시 5년이 흘렀지만 공무원과 함께 일하면서 겪는 주민의 어려움들은 여전히 많다. 그래도 학교급식조례 제정과 옥천푸드조례 제정 시도 등 자치와 순환의 지역공동체 형성을 위한 노력들은 오늘도 계속되고 있다. 

 

●안남배바우작은도서관 (2007.7.20)
국립중앙도서관의 작은도서관 만들기 사업에 공모해 지원받은 2억 원의 기금과 <책읽는사회문화재단>, <옥천군>의 지원을 받아 설립한 마을 도서관이다. 10여 명의 주민이 추진위원회를 맡아 매주 모여 공부하고 다른 지역 도서관을 견학하면서 만들어냈다. 지역의 아이들과 할머니들이 가장 즐겨 이용하는 공간이다. 

 

●금강유역환경회의 (2007.11.29)
금강유역에서 활동하는 20여 개 환경단체들의 연대 기구다.
환경오염, 4대강 보호 등 환경이슈에 공동으로 대응하는 활동을 펼쳐 왔다.

 

●대청호환경농민연대 (2008.1.11)
옥천, 무주, 진안, 영동, 보은에 걸쳐 있는 대청호 상류 지역 주민들의 어려움을 공동으로 해결하기 위해 만든 주민 간 연대체이다. 상수원보호를 위해 각종 행위 제한을 받고 있는 대청호 상류지역 농민들은 흙과 물을 살리는 운동의 일환으로 친환경농업을 추진하고, 맑은 물을 공급받는 하류지역 주민들은 친환경 농산물을 소비함으로써 상생의 토대를 마련한다는 목표를 가지고 활동하고 있다. 옥천흙살림, 영동친환경연구회, 보은 친환경쌀작목회, 청원문의환경농민연대, 충남 금산환경농업농민회, 전북 무주반딧골연합회 등이 참여하고 있으며 대전과 청주 등 도시지역 학교에 친환경 농산물 급식을 추진하는 등 로컬푸드 운동을 전개한다.

 

●옥천살림 영농조합법인 (2008.3월) 
옥천살림은 친환경 농업을 하는 20명 농부의 출자로 시작되었다.
‘순환과 공생의 지역공동체를 만들어가는 로컬푸드’를 표방하는 옥천살림은 옥천군 친환경 농산물의 유통을 담당한다. 학교급식운동을 통해 조례를 만들고 어린이집과 학교에 친환경 지역농산물 식재료를 공급하며 일반 가정에는 꾸러미 배달 사업을 통해 생산자・소비자 간 직거래를 도모하는 등 지역의 자급순환체계를 만드는 데 한 몫을 담당하고 있다.

 

●안남 산수화권역 추진위원회(2009.12)
농・식품부가 관장하는 ‘농촌마을종합개발사업’을 추진하기 위한 단위로, 안남의 산수화권역은 2009년 말 신규 권역으로 선정됐다. 안남면의 3개 마을(연주2리, 도덕2리, 청정리)과 안내면의 현리 등 5개 마을로 이루어진 산수화권역은 ‘로컬푸드 네트워크 거점을 위한 사업’을 주요 사업으로 추진하며 이를 위해 2015년까지 58억 원의 사업비가 지원된다. 
산수화권역은 다섯 개 마을에 해당되지만 사업은 안남면 전체를 바라보고 추진하며 지역발전위원회 중 한 분과에 소속돼 마을 전체와의 일상적인 소통과 협의 속에서 진행한다.

 

 

                                                  ▲ 옥천군 지도(출처:옥천군청)

 

 Ⅱ. 시사점

 

 

●이십여 년 전 탄생한 두 개의 중심축, 옥천신문과 농민회

 

1989년 6월에 옥천신문이, 1990년 3월에 옥천군 농민회가 발족했다. 다양한 조직이 들어서는 2천 년 대에 이르기 전, 10여 년 간 옥천지역 주민 활동의 근간이 되었던 두 개의 조직은 이렇듯 6개월의 차이를 두고 생겨났다. 신문과 농민회는 그 역할이 다른 만큼 평소에는 각자의 영역에서 활동하면서도 서로 건강한 긴장관계를 유지했다. 신문은 농민회가 하는 일을 지면에 많이 담았고, 농민회도 신문에 우호적 관계를 유지했다. 그러나 신문의 비판적 기조가 약해지면 농민회에서 문제를 제기하고, 농민회가 잘못 하는 일은 신문이 비판했다. 서로에게 지지와 비판, 견제의 역할을 하면서도 안티조선운동과 학교급식조례 제정운동, 골프장 반대농성 등 지역 공동의 사안이 생기면 힘을 모으며 함께 활동을 해 왔다.


 

●‘지역’의 화두를 놓치지 않은 농민회, 조직이 아닌 개인으로 스며들기

 

옥천군 농민회는 9개 읍・면 중 가장 작은 안남면과 안내면에서 발아됐다. 초기 농민운동이 활발했던 영동・보은 등 인근 지역과는 달리 옥천군 농민회는 가늘고 길게 살아남았다. 여느 농민회와 마찬가지로 서울로 올라가 아스팔트 농사도 짓고 우리 농업을 지키기 위한 활동을 하면서도 옥천군 농민회는 지역에 관한 고민을 놓지 않았다. 사무국장, 대표 등을 거친 농민회 주요 구성원들은 주민자치센터와 안남어머니학교・지역발전위원회・배바우작은도서관・여러 거버넌스 기구를 이끌며 안남면과 옥천의 주민자치 토대를 구축했다. 이들은 ‘농민회’라는 조직의 이름을 고집하지도, 주민 위에 군림하지도 않았다. 농민회 대표를 지낸 주교종 씨가 안남면 주민자치센터 사무국장으로 일하겠다는 뜻을 밝혔을 때 내부에서는 “대표 하던 사람이 어떻게 사무국장으로 들어가느냐?”며 반발도 많이 있었지만 주 씨는 그 뜻을 굽히지 않았다. 회원 개인이 조직 밖으로 나와 주민과 함께 일하는 방식은 더 많은 사람들을 아우를 수 있게 했다.    


 

●정부 정책을 자치의 기반으로 활용하기

 

자칫 형식적으로 운영되기 쉬운 관의 정책들을 무시하지 않고 적극적으로 받아들였다. 예컨대 주민자치센터는 전국적으로 자치의 구심보다는 문화센터 정도의 기능을 수행하는 곳이 많은데, 안남면은 센터 초기부터 지역 조직들과 함께 작은 음악회나 마을 축제를 기획하는 등 주민자치 실현의 주요한 장으로 활용했다. 

안전행정부의 정보화마을 사업도 마찬가지다. 2006년 정보화마을로 지정된 배바우 청정마을 정보화센터는 지역에서 생산한 친환경 농산물을 온・오프라인으로 판매해 2008년 7백만 원이던 농가소득을 2009년 6천만 원으로 끌어올렸고 마을기업으로 선정돼 받은 지원금은 주민 실생활에 필요한 장터복원사업 등을 위해 사용했다.


무엇보다도, 대청호 상류 지역 개별 가정에게 선심성으로 지급되던 주민지원사업비를 한데 모아 지역발전을 위한 공동사업비로 쓰기로 합의하고, 이를 집행하기 위한 단위로 지역발전위원회를 만든 것 또한 눈에 띄는 부분이다. 위에서 지시한 정책이 아님에도 스스로 주민평의회 형식의 의사결정기구를 만들고 개인이 받아가던 돈을 전체를 위해 내놓기로 합의하는 등, 다른 지역에서 보기 힘든 사례를 안남면 주민들은 실천으로 옮겼다. 안남면 지역발전위에서 시작한 30% 주민공동사업비’는 옥천군과 금강유역환경청의 정책도 변화시켜 다른 지역에도 적용하도록 했으나 자발적 욕구가 없는 상태에서의 의무화는 마을마다 건물 하나씩 짓고 마는 결과를 낳을 수밖에 없었다.   


 

●안남의 주민운동 스타일, 공론장 만들기 

 

옥천의 운동방식은 일단 ‘공론장’을 만드는 것이다. 공론장을 중요하게 생각함은 소통과 협의, 자치를 중시함을 뜻한다. 한두 명의 뛰어난 인물보다는 평범한 주민에 대한 신뢰를 갖고 있다는 말이기도 하다. 대개의 지역에서는 선거가 다가오면 자신과 뜻 맞는 사람을 단체장이나 의원으로 내세우지만 안남의 사람들은 우직스러울 만치 공론의 정치를 고집한다. 지역발전위원회를 만들어 주민의 의사를 대변하고 농업발전위원회를 구성해 정책과 예산을 견인한다.
엘리트 운동가들의 패거리정치도 거부한다. 관변단체와 시민단체, 공무원과 주민 간에 편 가르기를 하지 않는다. 같은 탁자에 둘러앉기를 끊임없이 시도한다.

여러 사람이 모이면 배 놔라, 감 놔라 간섭하는 이도 많고, 딴죽 거는 사람도 있다. 도서관을 지을 때도 “누가 책 볼 사람 있냐?”며 돈 낭비 한다고 하네 마네 의견이 분분했다. 억지소리 하는 사람 말은 끊고 가면 쉽기야 하겠지만 이들은 합의점을 이룰 때까지 대화를 포기하지 않는다. 때로는 멱살잡이 하며 싸우고 마음 상해 나가는 사람도 있지만 그럴 땐 불편한 대로 시간이 지나기를 바랄 뿐이다. 다퉈도 계속해 얼굴 맞대고 살아가야 하는 곳이 바로 마을이니까… 주민들은 이러저러한 일을 겪으며 성숙의 과정을 밟는다. 

지역발전위원회 회의록을 보면 점점 주민들이 안건을 제안하는 경우가 늘고 있다. 도무지 입을 열 것 같지 않던 주민이 기발한 아이디어를 낼 때도 있다. 면사무소 앞 농산물 판매장인 ‘안남이야기터’현판도 지역의 서예가에게 맡기려다 어머니학교에 글씨를 부탁하자는 어느 주민의 제안으로 방향을 돌리게 되었다. 화려한 기교는 없지만 소박하고 정갈한 글씨 속에서 어머니학교 학생들의 모습이 떠올라 웃음을 짓게 된다.
 

10년째 이어오는 ‘작은 음악회’행사가 자치위원들에 의해 축소될 뻔 했을 때에도, 주민들은 행사를 귀찮게 여기는 위원들을 비난하지 않고 “내가 도와줄게. 나머지 시간 우리가 메울 테니 같이 해보자.”며 격려하는 성숙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숨은 리더십의 비밀

 

안남면의 조직들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눈에 들어오는 두 명의 인물이 있다. 배바우작은도서관, 지역발전위원회, 정보화마을의 대표를 맡고 있는 주교종 씨와 안남어머니학교, 산수화권역추진위원회를 이끌고 있는 송윤섭 씨다. 이들은 모두 농민회 출신으로 20년 넘게 안남에 살면서 마을공동체를 일구는 일에 매진했다. 굳이 비교를 하자면, 옥천신문의 오한흥 씨가 금기를 넘어서는 번뜩이는 아이디어로 단기필마 앞장서는 형이라면 이 둘은 동네 한가운데 자리를 잡고 사람을 넓게 아울러 일하는 형이다. 둘 다 서울대를 나왔고 농민운동을 했지만 동네 사람들에게 이 둘은 언제든 대거리 한번 해볼 수 있는 만만한 이웃이다. 선출직에도 욕심이 없어 군수나 군의원 선거에도 나간 적이 없다. 2005년 주교종 씨가 농협 조합장 선거에 출마했다가 상대 후보에 50표차로 아깝게 떨어진 적은 있지만, 이웃들은 이들을 ‘동네일 열심히 하는 사심 없는 사람’으로 인정한다. 만일 이들이 선거에 나오려고 일했다면 지역에서 살아남았을까? “결국 정치하려고 그랬구나.”하는 오명을 쓰지 않고 묵묵히 일해 온 이들에게 동네일은 삶 그 자체였다.


 

●소통의 수단을 확보하라.

 

옥천에는 여러 회의체 외에 또 하나의 공론장이 있는데 이는 바로 옥천신문이다. 옥천의 여러 소식을 널리 알리는 확성기 역할 외에도 주민이 벌이는 활동들이 좋은 것이라고, 그 가치를  일깨워주는 역할을 옥천신문은 20년이 넘도록 충실히 해 왔다. 잘못된 행정에 대해서는 어김없이 날카로운 비판을 가하니 행정에서는 옥천신문을 무시할 수가 없다. 반면 주민에게는 문턱이 낮은 친근한 신문이다. 주민들은 수시로 옥천신문에 전화를 걸어온다. 축구를 보다가 페널티킥이 뭐냐고 물어오는 사람도 있고, 누구네 집 청둥오리가 새끼를 많이 낳았다고, 도라지 큰 놈을 발견했다고 알려주는 이들도 있다. 옥천신문은 사람 얼굴이 많이 나오도록 일부러 단체사진을 많이 싣는데 주민들은 자기 얼굴이 나온 신문을 보며 이웃과 이야기꽃을 피운다.
옥천신문이 성에 차지 않는(?) 안남면 주민들은 배바우 신문을 만들었다. 주민 한 명 한 명의 목소리를 더 가까이서 듣기 위한 이들의 발길은 자꾸 아래로 향한다.


 

*****
  

자전거포, 빵집, 고무신 가게, 씨름장, 천막영화관... 30년 전 안남에는 없는 게 없었다. 닭전, 돼지전, 장날이면 북적북적했단다. 그리 멀지 않았던 과거의 풍경을 어떻게 복원시킬까 고민하는 황민호 씨는 안남의 미래를 위해 할 일이 무척 많단다. 아침에는 옥천살림에서 배달을 하고 오가는 할머니들에게는 말벗이 되며, 신문과 회의 등 동네일에 참여하고 기록하는 황민호 선생, 고향인 대전을 떠나 정든 안남에서 자치의 꿈을 꾸는 그는 솔직히 지뢰밭을 걷는 기분이라 했다. 곳곳에 예측 못할 갈등과 고비들이 많아서이다. 같이 일하던 공무원이 싹 다른 곳으로 가 버릴 때, 동료가 힘들어 하며 갑자기 일을 놓을 때, “너 뭐하려고 이 일 하는데?”라며 진심을 몰라주는 공격을 받을 때면 하루에도 몇 번씩 ‘내가 뭘 하려고 이러고 사나’회의가 들지만 “그래서, 여길 떠나면 어쩔 건데?”라는 질문 앞에 다시금 마음을 가다듬는다. 젊은 사람이 도시로 나가면 좀 더 자유롭게 살 수 있겠지만 수십 만 중 한 명과 천오백 명 중 한 명의 비중이 어찌 같을 수 있겠는가?
한 사람 한 사람을 소중히 여기는 데서 출발하는, 공론의 정치가 우리의 미래가 될 수 있을까?
천천히 그 길을 열어가는 안남의 주민들에게 감동의 박수를 보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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