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自由人/책과 영화

이동호「돼지를 키운 채식주의자」

by 제갈임주 2022. 10. 7.

출산 말고는 병원 신세를 져 본적이 없던 나, 건강만큼은 자신 있다고 생각했는데 며칠 전 난데없는 증상이 찾아왔다. 자고 일어나면 손가락이 펴지질 않는다. 밤잠이건 낮잠이건 잠만 자고 나면 손가락과 발목 관절이 뻣뻣해져 아프고 통증이 한참동안 가시질 않았다. 찾아보니 류마티스 관절염의 초기증상이란다. 한두 달 지속되면 병원 가서 진단을 받으라 하는데 조금 더 지켜보기로 하고 그동안 함부로 다뤘던 몸을 돌아본다.

가볍게 먹는 아침
가볍게 먹는 아침

하루 커피 서너 잔, 그것도 절반 이상은 믹스. 거의 하루도 빠짐없이 먹는 고기, 달걀, 생선, 우유 같은 동물성 단백질. 이것부터 바꿔볼까? 어느 유명한 박사님의 유튜브를 보니 2주만 현미채식을 하면 관절염 증상이 줄어들 거라 하는데 밑져야 본전이라 생각하고 식단부터 바꿔본다. 현미, 귀리, 콩, 버섯, 각종 나물과 과일로 끼니를 채우고, 요가와 산책, 등산으로 시간을 보낸다. 일이 없기 망정이지, 아니 일이 없어서 찾아온 병일지도.. 아무튼 몸이 아프다고 신호를 보내니 지금은 돌봐줄 때다.

다른 세상 언어였던 ‘채식’이란 단어는 그렇게 내게로 찾아왔다. 그리고 그동안은 일이 바쁘다는 핑계로 책장에 꽂아만 두었던 한 책에 자연스레 눈이 갔다.
 

'돼지를 키운 채식주의자'


작년 6월 내 손에 오게 된 이 책은 홍성 사는 수수 친구 호호가 쓴 책이다.
저자인 이동호, 호호의 본명이다. 호호가 책을 쓸 거라고 생각해보지 못했다. 내가 본 호호는 과묵했다. 말이 많지 않았고, 말을 급하게 내뱉지도 않았다. 수수와 지숲, 내가 떠들 때 호호는 옆에서 아무 말도 듣지 않은 사람처럼 무심한 표정으로 있다가 그저 한두 마디씩 대화를 거들곤 했다. 담백하고 재미있다는 느낌은 받았지만 이렇게나 재밌게 책을 쓸 줄은 몰랐다.

모든 표현이 생생하다. 농업학교에서 백일 돼지 세 마리를 집으로 데리고 온 날부터 벌어지는 일을 직접 겪으며 쓴 글이라 문장 하나하나가 머릿속 그림이 되어 움직일 정도로 디테일이 살아있다. 그리고.. 따뜻하다.

돼지를 잡는 날, 내 마음은 어떨까? 측은함이나 가책을 느낄까? 주저하게 될까? 혹시 눈물이 날까? 못 먹는 건 아닐까? 나는 돼지의 이름을 짓지 못했다.


‘생명을 정성들여 키우고 그 생명을 죽여서 먹는 과정을 통해 자연의 순환과 생명의 고귀함을 지킨다’는 생각으로 돼지를 키웠지만, 결국 종착역은 도축이라는 생각에 저자는 돼지에게 미안한 마음을 떨치지 못한다. 돼지 잡을 생각만 하면 잠을 뒤척이면서도 저자는 왜 도축을 기어이 제 손으로 하려 했을까?

그럼에도 나를 돼지 앞으로 데려다놓은 것은 어떤 예의였다. 돼지를 취할 사람으로서 직접 잡아야 한다는 일종의 책임감. 돼지를 마주할수록 그 마음이 커졌다. 잡아먹는 게 배신이 아니고 남의 손을 빌리는 게 배신 같았다.


읽는 내내 재미있고, 따뜻하면서도, 내용은 결코 가볍지 않다.

우리나라 돼지의 99%는 평생 흙을 밟아보지 못한다. 사방이 막힌 시멘트 방에서 분말 사료만을 먹으며 6개월이라는 짧은 생을 산다. 99%의 돼지는 도축장에 가는 날 처음으로 햇빛을 본다.


공장식 축산 등 우리 축산의 문제와 생명에 가해지는 폭력적인 생산 과정을 저자는 잔잔하고도 쉬운 언어로 펼쳐 보인다. 책을 읽다보면 마치 햇볕이 나그네의 옷을 벗기듯 반성의 대열에 동참하게 된다.
혼자 읽기 아까워 누군가에게 선물하고 싶은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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