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화 한 통이면 선생님과 직접 대화할 수도 있지만 물어물어, 돌아돌아 찾아뵙고 싶은 마음은 왜일까.
폭풍같았던 88,89년의 여름 아무 것도 모르던 순진한 소녀에게 세상의 진실에 대해 호기심을 갖게 해 주셨던 분. 지금의 내 삶에 첫 씨앗을 뿌려주셨던 선생님.
20년이 지나도록 변함없으신 모습에 나 역시. 변함없는 신뢰와 존경을 전한다.
* 사진&글.. 허락도 받지 않고 걍 올린다. 용서해 주시겠지^^;;
<그 때 그 시절>
[펌]전교조 서울지부 사강지회에서..
동지들께 작별 인사를 드립니다
2009-8-31
안녕하십니까? 정신여자고등학교 장동찬입니다. 오늘 여러분께 작별 인사를 전하고자 이 자리에 들어왔습니다. 제가 오늘 8월 31일부로 정신여고를 떠나게 되었습니다. 27년 동안의 교직 생활을 접고, 9월부터 귀농하여 새로운 삶을 살아보고자 합니다. 몇 년 전부터 계획한 일이었기에 나름대로 새로운 삶에 대한 기대와 설렘을 가지고 떠납니다.
하지만, 막상 퇴직이 결정되니 제일 먼저 떠오르는 것이 우리 전교조 동지들에 대한 송구스러움과 미안함이었습니다. 특별히, 많은 동지들이 파면, 해직되고, 학교에서 고초를 겪으면서 열심히 투쟁하는 이 시기에 전교조 선배 조합원으로서 힘이 되어주지 못하고, 홀로, 곱게, '명예' 퇴직을 하게 되었습니다. 퇴직 앞에 붙은 '명예'라는 수식어가 가슴을 찌릅니다. 폭풍우 치듯 험난했던 시절 보내오면서 숱한 동지들이 해직 당하고 핍박을 받으면서도 교육 현실을 바꾸기 위해 그 초심을 지켜가고 있는데, 학교 현장은 이성을 잃고 더욱더 미쳐날뛰고 있는데, 이제 나는 연금 해당 년수를 곱게 채워 '명예'롭게 퇴직을 하는구나 생각하니 참으로 민망하고 착잡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80년대 중반 교육운동이 시작된 시절부터 전교조 창립과 합법화 시기를 오로지 이곳 사립강남동지회에서 선후배 동지들과 함께 애환을 같이 해 온 사람으로서 오늘의 교육 현장을 바라보는 감회는 매우 참담합니다. 뻔뻔스런 탐욕이 모든 건강한 토론을 무화시키고, '경쟁'이라는 덫에 걸려 모든 사고력이 정지되어 있는 작금의 학교 현장을 저만 홀로 도망치듯 빠져나가는 것이 아닌가 하는 자책감이 듭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제 자신의 교육적 열정과 감동이 고갈되고, 교육적 상상력이 한없이 빈약해지고 있음을 고백합니다. 또 조직 내에서 제 역할을 제대로 해내지 못하고 있는 무기력한 자신을 돌아보게 됩니다. 이런 저런 구차한 이유와 변명으로 동지들의 힘을 빠지게 할 것을 생각하니마음이 편치 않네요.
사실, 초년 교사 시절부터 내 삶의 여정에 한번쯤은 교사 아닌 다른 삶도 살아 보고 싶다는 생각을 가졌더랬습니다. 그리고 몇 년 전부터 새로운 삶을 모색하고 있었습니다. 작년 여름 전국귀농운동본부에서 주관하는 '생태귀농학교' 프로그램에 참석하고 더욱 결심을 굳히게 되었습니다. 모든 것이 경쟁과 소비로 점철되는 시대에, 상생과 절제를 말하는 귀농운동에 관심을 가지게 되면서, 지금까지와는 다른 삶을 살 수도 있겠구나 하는 희망을 가지게 되었지요. 얼마큼 버느냐, 쓰느냐가 아니라, 얼마큼 생산하느냐, 안 쓰느냐가 도덕의 기준이 되는 사회. 얼마큼 높아졌느냐가 아니라, 얼마큼 낮아졌느냐로 자부심을 느끼는 삶, 헛된 '욕망'에 짓눌리지 않고, 소박한 '소망'을 품고 사는 삶, TV나 인터넷과 백색의 소음, 이미지에 코를 박느냐, 들판과 강물과 하늘과 새를 바라보느냐. 이 유쾌한 선택지를 두고 고민하는 사람들을 보고 내심 감동을 받았지요. 어렵지 않게 결단을 내렸습니다. 그래서 곧 학교를 그만두고 귀농할 거라고 주위 사람들에게 떠벌이고(?) 다녔지요. 제 결심이 흔들릴까봐 스스로 쐐기를 박아 놓은 겁니다. 1년쯤 이것저것 배우면서 농사 준비를 했습니다. 지난 봄부터는 귀농지를 물색해서, 9월부터 충북 괴산에 내려가 농사를 배울 계획입니다. 가족과 주변 친지, 벗들이 많이 격려해주고 있습니다만, 처음 해보는 일이라 주위에서 걱정도 많이 하고 있습니다. 저 또한 걱정이 많이 됩니다. 하지만, 50대 중반의 나이에도 꿈꾸는 일을 실현해 볼 수 있다는 사실이 적절한 긴장감과 기대감을 동시에 주고 있습니다. 하룻밤에도 몇 번씩 두려움과 설렘이 가슴속에 교차하고 있습니다. 두려움보다는 설렘을 앞세워 나아가려고 합니다.
새벽마다 벼를 보고 큰소리로 인사를 건넨다는 어떤 농부님의 말씀을 마음에 새기려 합니다. 이제부터는 1교시, 2교시……, 여름방학, 겨울방학… 하는 기준이 아니라 씨 뿌리고, 김매고, 거두고, 갈무리하는 절기를 따라서 풀과 꽃과 나무와 열매들에 이름을 고루 불러주고 인사를 건네며 흥겹고 평화롭게 살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선배 농부님들 잘 받들고 어울려서 지역에서 활기찬 마을도 만들어 보겠습니다. 청경우독(晴耕雨讀), 조도석작(朝禱夕作), 기도와 노동으로 살아가는, 영혼 있는 농부가 될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조금 거창해졌네요……) 자리잡는 대로 또 소식을 전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동안 우리 사립강남동지회 선생님들 만나서 참 즐거웠고 보람 있었습니다. 선후배 조합원 동지들 한 분 한 분에 대한 존경의 마음이 제가 선생노릇하는데 게으르지 않도록 자극이 많이 되었습니다. 그동안의 정분(?)을 잊지 못할 것 같아, 언젠가 또다시 만날 수 있는 게 아닌가 하는 꿈같은 생각을 해 봅니다. 그래서 지금, 많이 떨립니다. 선생님들과 끝까지 함께 하지 못하고 먼저 떠나게 되어 송구스럽고 아쉽다는 말이 반복되네요.
전교조, 어떤 평가에도 불구하고 늘 순수했고, 옳았고, 진정성이 있었음을 기억합니다. 그래서 자랑스럽습니다. 지회 동지들, 그동안 고마웠고요, 참으로 존경하고 사랑하고, 끝까지 지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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