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自由人/끄적끄적

최민식 선생님

by 제갈임주 2010. 1. 14.
아침부터 눈물나네..

*     *      *

나를 키운 건 8할이 베토벤 선생이야
[인터뷰] 여든한 살의 다큐멘터리 사진작가 최민식...그가 밝힌 <인간> 뒷이야기
10.01.14 10:10 ㅣ최종 업데이트 10.01.14 11:37 신정임 (jjung0102)
 
 
 
  
50여 년 동안 가난한 이들의 삶을 카메라에 담아온 사진작가 최민식
ⓒ 최민식
최민식


고무줄놀이하는 아이들이 높이 뛴다. 자갈치시장 두 아지매가 머리끄덩이를 잡고 싸우고 있다, 주름 자글자글한 할아버지가 입을 쩍 벌리고 하품을 한다.
 
단 몇 초만 지나도 금세 사라질 순간들이 흑백사진 속에 멈춰있다. 프랑스의 유명한 사진작가 알리 카르티에브레송은 이를 '결정적 순간'이라고 칭했다.


앞서 소개한 사진들은 다큐멘터리 사진작가 최민식(81) 씨의 결정적 순간들이다. 현역이라고 하기엔 결코 적지 않은 나이, 하지만 그는 10kg이 넘는 사진 가방을 메고 오늘도 거리 곳곳을 누비고 있다.


새해다. 새해 선물로 독자들에게 어떤 산에서도 받을 수 없는 정기를 드리려고 한다. 온갖 풍파 속에서도 50년 한 길을 걸어온 한 거장의 삶이다. 또 그의 사진 속에 담긴 가장 낮은 곳, 서민들의 이야기다. 웃음과 눈물, 행복과 고통이 교차하는 삶의 현장만큼 가슴을 고동치게 하는 것도 없다.


'시간여행자'의 아날로그 세상
 
KTX에 몸을 싣고 최 작가의 제2의 고향이라는 부산으로 향했다. 무궁화호였으면 거의 6시간 걸렸을 시간이 절반으로 줄었다. 속도가 지배하는 시대다. 최 작가는 이 시대의 흐름을 거스른다. 바로 집부터 그의 삶을 대변한다. 동네시장 입구에 있는 그의 집에는 옛집에서나 봄직한 세간을 넣어두는 광과 작은 마당이 있다. 현관 옆에는 작은 화분들이 놓여 있다.


그의 사진 세계는 더 아날로그적이다. 찍으면 바로 볼 수 있는 디지털카메라가 천지에 널렸는데 그는 여전히 필름카메라를 고집한다.


"내 마음대로 작업할 수 있어. 농도 등을 내 느낌에 맞게 조절하려고…."

장인의 숨결이 전해진다. 그는 집에 암실이 있어 돈도 별로 안 든다고 덧붙인다.


그렇다면 흑백사진인 이유는 뭘까. 그는 "내 사진은 화려하지 않아요, 가난한 사람들의 어두운 생활상이 주여서 패션사진같이 화려한 칼라일 필요가 없죠, 또 사진집 낼 때 흑백이 경제적이죠. 칼라에 비해 1/3밖에 돈이 안 드니까…"라고 답한다. 사상과 경제성이 함께 있다.


다큐 작가에게 돈은 늘 하고 싶은 것과 할 수 없는 것을 가르는 경계다. 최 작가는 평생 그 경계에서 외줄타기를 해왔다.


 
  
부산, 1996, <인간> 13집
ⓒ 눈빛
최민식
종이거울 속 자화상


그의 사진엔 가난한 이들의 남루한 일상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아이가 길가에서 밥을 먹는가 하면, 길가에서 지게꾼이 낮잠을 잔다. 비오는 날 판매대를 배로 밀면서 물건 파는 장애인의 모습은 애써 외면하고 싶어진다. 혹자는 그를 '거지작가'라고 폄하하기도 한다.


사진 속 가난은 일평생 그의 곁을 맴돌았다. 그가 한 일화를 소개한다.


"먼 친척뻘인 동네 아이가 시루떡을 먹더라고. 하도 배가 고파서 그걸 뺏어 먹었잖아. 애가 '아~앙' 울면서 지네 엄마한테 가서 이른 거야. 근데 아주머니가 떡을 먹으라고 접시에 담아왔어. 뺏어먹길 잘했지. 동생들과 나눠 먹을 수 있었잖아."

70여 년 전인 초등학교 5학년 때 일을 그는 정확히 기억했다. 남의 땅 농사지어 1년 소작료 내면 그의 일곱 식구는 7개월밖에 살지 못했다. 남은 5개월은 몰래 남의 밭에 가서 감자 캐오고, 산에서 나무를 해다가 시장에 팔았다. 수없이 배를 곯았다.


그의 아버지는 다리를 절었다. 젊은 시절 친구들과 놀다가 다쳤다. 힘든 농사일은 어머니와 그의 몫이었다. 아버지는 서예를 잘했다. 동네에서 도장을 파고 병풍에 글을 써주고 적은 돈을 벌었다. 그의 사진에 몸이 불편한 이들이 종종 등장하는 이유가 있었다.


"아버지가 내가 그림을 잘 그린다고 하셨어. 손재주가 아깝다며 도회지로 나가라고…." 


그는 아버지 말에 힘입어 열다섯에 집을 나왔다. 일제시대, 비행기 날개 만드는 군납업체 기능자 양성소에 들어간다. 하루면 작업복이 닳아버리는 무서운 염소가스를 다루면서도 그는 그림에 대한 꿈을 키웠다. 해방 후, 밤에는 미술학원에서 그림을 배우고 낮에는 돈을 벌었다. 지게꾼도 하고, 고구마 장사도 하고, 과자공장에서도 일을 했다. 그나마 편했던 일이 인쇄소에서 도안을 그렸을 때다.


2004년에 나온 최 작가의 자전적 삶을 담은 사진 에세이 <종이거울 속의 슬픈 얼굴>에서 종이거울은 사진을 뜻한다. 그가 찍은 종이거울에 비친 가난한 이들은 그의 자화상인 셈이다.


"희로애락을 겪으니 희로애락을 찍겠더라"


"이게 그냥 돌덩이 같지만 철학적 의미가 담겨있어요. 인간을 얘기한 거지. 인간이 살아가기가 이렇게 험난하다. 잔디 같으면 빨리 가잖아. 그런데 이런 돌밭 가려면 가시도 있고 독사도 있고 힘들죠. 그냥 이렇게만 가려면 얼마나 고통스러워요. 우린 희망이 있어야 하잖아. 이 산 넘어는 희망을 표현한 거야. 산을 넘어가면 전원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그림을 배우던 그가 사진으로 돌아선 '결정적 순간'이 있다. <인간가족>이란 사진집을 봤을 때다. 그는 그림을 제대로 배우겠다고 스물여덟 살 때 일본으로 밀항했다. 낮에는 식당, 인쇄소에서 일하고 밤에는 미술학원을 다녔다. 그러다가 도쿄의 한 헌책방에서 우연히 <인간가족>을 봤다. 사진작가 에드워드 스타이켄이 세계 각국의 사진들을 모아 인간의 생로병사와 희로애락을 표현했다. 최 작가는 <인간가족>을 "국경과 환경은 달라도 모든 인간은 한가족"이라는 내용을 담고 있다고 해석한다.


그는 기자에게 너무 많이 봐 낡아서 벌써 세 번째 샀다는 <인간가족>을 내밀었다. 그중 어느 작품이 그렇게 감동적이었냐는 질문에 그는 풍경사진의 대가 안셀 애덤스(Ansel Adams)의 윌리암슨산(Mount Williamson)부터 꼽는다. 그냥 돌밭풍경으로 넘길 수도 있는 사진에서 철학적 의미를 캐낸다. 연이어 나치에게 끌려가는 이스라엘인, 관 앞에서 통곡하는 한국의 여인, 가난한 인도인의 사진 등을 보여준다.


"나도 이 정도는 찍을 수 있겠다 싶더라고…."

사진을 접해본 적도 없는 생초보가 세계의 내로라하는 거장들의 사진을 보고 어떻게 이런 생각을 할 수 있었을까. 그는 '경험'이라고 했다. 온갖 고생을 다 해본 그였기에 인간의 희로애락을 담은 사진에 끌렸고, 그런 사진을 찍을 수 있을 것 같았다고.


 
  
안셀 아담스, 윌리암슨산
ⓒ 부산일보출판국
안셀 아담스


허름한 옷차림에 '간첩' 오해도
 
누가 가르쳐주는 사람도 없었다. 친구 여섯과 함께 독학을 했다. 낮에는 리어카로 넝마주이까지 하면서 밤에는 사진에 몰두했다. 서른 살, 그는 낡은 사진기와 사진집 몇 권을 들고 다시 밀항선을 타고 한국으로 돌아왔다.
 그 후 그는 본격적인 사진가의 길을 걸었다. 그 길은 흔한 말로 가시밭길이었다. 그는 자신의 자전적 에세이 <낮은 데로 임한 사진>에서 그 길을 이렇게 표현한다.
 
"쌀을 사 놓으면 연탄이 떨어지고 연탄을 들여놓으면 쌀이 떨어지는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집도 팔아야 했기에 밤에만 수돗물이 나오는 달동네에 살기도 했다." 그러나 자초한 일이었다. 그는 카메라 셔터로 '인간'을 잡아내겠다고 결심했다. 그에게 '인간'은 그와 똑같은 가난한 이들이었다. 그의 사진기 안엔 '팔리지 않는' 사진들이 가득했다.
 
"만약 내가 돈 많은 부잣집 자식 같았으면 이런 사진 안 찍었을 거야. 사진도 취미로, 벽에 걸어놓고 감상하기 좋은, 그림 예쁜 살롱사진만 찍었겠지. 기자님, 아프리카에 어린이가 5초에 한 명씩 죽어난대요. 미국에선 3천만 명이 저녁거리를 걱정하고…. 근데 생산되는 식량은 충분하다는 게 아이러니지." 그의 가난한 이들 걱정은 여전했다. 그가 갑자기 이야기 도중 책꽂이에서 책을 꺼내 <로마의 휴일>로 유명한 오드리 햅번이 한 말을 들려준다. "날씬해지고 싶다면 다른 사람들과 나눠 먹으세요."
 예술가는 본디 아름다움을 추구한다. 그도 그냥 서있는 것만으로도 그림이 되는 연예인이나 모델들 사진을 찍고 싶지 않았을까. 돈도 많이 벌 수 있는…. 그는 단번에 고개를 가로지었다.
 
"대학에서 강의할 때도 학생들한테 가난한 아이들의 사진을 보여줘요. '이 아프리카 아이들의 비참한 모습에서도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어야 한다'고 얘기하지. 꽃이나 풍경, 누드도 아름답긴 해. 하지만 그런 피상적인 아름다움과는 다른 내적 아름다움도 아름다운 거야." 그는 눈으로 보는 아름다움을 넘어 마음으로 읽는 아름다움을 강조했다. 그런 그에게 한 지인이 교통법규 위반자를 몰래 찍는 카파라치를 제안했단다. 서울에 목 좋은 곳이 있다고…. 최 작가로부터 그가 들은 대답은 욕지거리였다.
 어두운 사진을 주로 찍다보니 박정희 시대엔 고초도 많이 겪었다. 정보부에 여러 번 끌려가 "왜 하필 가난한 사람들을 찍느냐. 북을 이롭게 하려는 거 아니냐?"는 서슬 퍼런 추궁에 시달려야 했다. 투철한 시민 의식 때문에 경찰서 신세도 많이 졌다. '허름한 옷차림을 하고 이른 새벽 산에서 내려오는 자, 남몰래 사진을 찍는 자….' 경찰이 밝힌 간첩 식별법은 딱 사진가들을 가리켰다. 그는 지난 50여 년간 줄잡아 100번은 간첩으로 신고됐을 거라며 웃었다.


 
  
부산, 1989, <인간> 13집
ⓒ 눈빛
최민식


"살아있다면 베토벤 사진 찍고 싶어"
 
<인간가족>으로 시작한 그의 사진인생은 <인간>으로 이어지고 있다. 그가 사진으로 담은 인간 군상들이 사진집 <인간>으로 담겼다. 벌써 13집까지 나왔고 내년에 14집이 나올 예정이다. 그에게 <인간>은 여러 악장으로 이루어진 교향곡과 같다.


"촌놈이 출세했지. 82년에 독일정부 초청으로 유럽 촬영여행을 했어요. 독일에 도착해 우리나라로 치면 문화부 같은 곳을 찾아갔지. 거기 담당 국장이 여성이더라고. 내가 그때 나온 <인간> 3집을 줬어. 그랬더니 그 국장이 '베토벤은 교향곡 9번까지 만들었는데 최 선생은 <인간>을 몇 집까지 낼 거냐'고 묻더라고."

자신의 사진집을 그가 제일 좋아하는 음악가인 베토벤의 교향곡에 견주는 것에 그는 감동했다. 그래 얼떨결에 대답했단다. "10집까지 낼 거다."


57년에 사진을 시작해 68년에야 처음 <인간> 1집을 냈던 그였다. 그 국장에게 했던 대답을 지키기 위해 그는 부단히 찍고 계속해서 사진집으로 엮었다. 1999년, 그가 목표로 했던 <인간> 10집이 나왔다. 그는 "14집 이후에도 두 권은 더 나올 자료들은 있지"라고 말했다. 인생목표의 160% 달성이다. 한 사람 한 사람의 이야기를 엮은 <인간> 교향곡의 울림은 계속된다.


베토벤 이야기가 나오니 그의 얼굴이 달뜬다.


"난 참 베 선생을 좋아해. 그 사람이 평생 작곡을 760곡 했어요. 57세에 죽었는데 36살 때 귀가 멀었어. 근데 귀가 먼 후에 760곡 중  83%를 작곡했어."

그는 베토벤이 얼마나 자기가 작곡한 곡을 듣고 싶었겠냐며 안타까워했다. 그러면서도 베토벤이 귀가 머는 고통을 겪었기에 그 선배인 하이든이나 모차르트와는 다른 음악을 작곡할 수 있었던 거라고도 했다. 귀가 먼 후 귀족들도 안 만난 베토벤이 한 말을 들려준다. "나의 음악은 특히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바쳐져야 한다."


그의 서재엔 베토벤이 촛불을 켠 채 지휘하고 있는 그림이 액자에 담겨있다. 그가 책에 나온 작은 그림을 3일 걸려서 따라 그린 거란다. 휘갈긴 베토벤의 사인까지 그대로다. 베토벤의 사진은 남겨진 것이 없다. 베토벤이 살아있을 때도 사진기는 있었지만 이동이 불편했던 당시 사진기를 그가 있는 곳까지 가지고 가지 못했단다.


최 작가가 그림 속 베토벤을 가리키며 말한다. "저 사람 살아있으면 밀가루 한 포대랑 치즈 2봉지랑 양주 2병 가지고 가서 '당신 독사진 한 장 찍으러 왔습니다.' 하고 싶어요." 저녁거리가 없을 만큼 살림이 어려웠던 베토벤에 대한 존경과 애정의 표현이다.


그가 오디오를 켠다. 책꽂이 양쪽에 놓인 30여 년 된 스피커에서 맑은 피아노 소리가 울린다. 베토벤의 피아노 삼중주 '대공'이다. "이 곡은 4악장까지 있는데 특히 3악장이 좋아요." 인터뷰가 갑자기 음악감상 시간으로 바뀌었다. 생애 첫 클래식을 들으면서 하는 인터뷰다. 그가 추구하는 사실주의와 클래식은 어째 어색한가. 그 역시 가진 자들이 클래식에 덧씌운 포장이다.


그의 말에 힘이 들어간다. "예술가는 다른 분야의 예술도 알아야 해요. 음악, 미술, 조각, 연극 등등을 다 알아야 내 사진이 더 깊어지죠."


"사진은 사상이다"
 
베토벤만큼이나 당황케 하는 건 그의 서재를 가득 채운 1만여 권의 책이다. 사진집은 물론 각종 전기와 에세이, 문학책들이 빼곡하다. 거기에 그치지 않는다. 철학개론을 비롯해 사회 사상사, 사회학 등의 책들도 상당하다.


'예술가가 웬 철학책이야.' 또 궁금해진다. "철학, 사회사 등을 읽어야만 우리 인간을 이해하고 사랑할 수 있죠." 그에게 사진은 '사상'이다. "어린아이나 원숭이도 셔터를 누르면 물리적으로 사진은 찍혀요. 하지만 작가의 자기 느낌이나 생각인 사상은 우러나오지 않죠." 무엇을 찍느냐보다 무엇을 전달하느냐가 중요하다는 말이다. 그 사상은 작가가 온몸으로 체험한 경험으로부터 나온다. 직접 체험을 하기 힘든 요즘 젊은이들은 책을 통해 간접체험이라도 하라고 그가 몇 번씩 말한다.


간접체험엔 여행도 있다. 그가 탐구하는 '인간'엔 국경이 따로 없다. 지금껏 43개국에 가봤다. 자유롭게 돌아다니는 걸 좋아해서 가능한 혼자서 여행을 떠난다.


"한 번은 인도를 갔는데 마을 족장집을 찾아갔어요. 그런데 환영을 안 해. 인사도 잘 안 받고…. 구석을 보니 짚더미를 쌓아놨어. 그 짚더미 밑을 조금 빼니 터널이 돼. 거기 안에다 가방이나 카메라를 집어넣고, 그 안에 들어가 얼굴만 밖에 내놓고 수건을 뒤집어쓰고 잤어요. 아침에 일어나니까 막 웅성웅성해. 수건을 걷어보니 애, 어른 할 것 없이 한 30~40명이 쭉 둘러서 날 쳐다보고 있더라고."

그들은 외국 거지가 온 줄 알고 물을 가득 담은 양동이와 세숫대야, 비누와 수건을 내밀었다. 그는 짚더미 속에 있는 카메라를 꺼내 그 장면을 찍고 싶은 생각에 휩싸였다. '거지가 어떻게 사진을 찍냐' 싶어 그 욕망을 꾹 참았다. 그들이 건네는 우유 탄 커피만 홀짝였다. "그 마을 언덕을 넘는데 언덕 밑에서 마을 사람들이 죽 서서 막 손을 흔드는 거야." 영화 같은 이야기를 그는 이렇게 실제로 경험하고 있었다. 그 경험이 고스란히 사진이 된다.


 
  
서울, 1957, <인간> 13집
ⓒ 눈빛
최민식


돈 못 버는 다큐 작가 아들에게도 권하기 힘들어
 
그는 상당히 많은 인터뷰를 했고 그의 인생을 담은 다큐멘터리도 만들어졌다. 그런데 그 속에서 가족 이야기를 찾기가 쉽지 않다. 예술가의 피는 유전되는지 궁금했다.


"자식이 3남1녀인데 둘째가 선박회사 다니면서 외국에 오래 있었지. 그때 월급타서 사진만 찍으러 다녔는데 애 엄마가 카메라를 압수했어. '너도 네 애비처럼 되려냐'면서…."

어려운 형편에 다방, 술집으로 일수까지 찍으러 다녔던 그의 부인은 여전히 그가 사진 하는 걸 못 마땅해 한다. 언론사에서 인터뷰를 하러 오면 숨어버린다고. 그는 아직 아내의 사진을 못 찍어 봤다고, 하지만 영정사진은 찍어주고 싶다고 했다.


사진 찍는 걸 좋아했던 둘째는 요리사 자격증을 따서 작은 식당을 하고 있다. "애가 셋이야. 애들 키우려면 돈 많이 들잖아. 나야 좋아서 했지만 집안 망할 거 각오하고 돈 못 버는 다큐 작가하라고 못하지." 대신에 둘째는 최근 서예를 배우기 시작해 한 대회에서 입선을 했단다. 그 아버지의 아버지 피가 이어지고 있다.


봉사활동을 많이 하는 그의 딸은 아버지가 여러 매체와 인터뷰하는 데 불만이 많다. 그의 책엔 언젠가 딸이 "아버지는 가난한 사람들을 팔아서 자신을 자랑하려는 거예요. 다른 사람들은 매스컴 안 타고도 얼마든지 좋은 일을 하잖아요! 왜 자꾸 응하세요? 전 아버지가 그러실 줄 몰랐어요"라는 가슴 찌르는 질문을 했다고 써 있다. 그 질문에 대한 그의 대답은 이랬다. "찾아오는데 막을 수 없잖니." 실제로 기자가 전화했을 때도 그는 많은 걸 묻지 않았다. 명예를 찾거나 이름을 내고 싶은 게 아니다. 지난 50여 년간 외면당해온 그의 사진과 사진 속 사람들에 대해 하고 싶은 말이 많을 뿐이다. 그가 세상을 등지면 다시 세상에 묻힐지도 모를 이야기들 말이다.


진실 좇아온 50년 "난 행복해"
 
최 작가를 처음 봤을 때 여든이 넘은 나이가 상상이 안 됐다. 립서비스가 아니라 정말 20년도 훨씬 더 젊어보였다. 그래 처음 그의 서재에 자리를 잡고 물은 질문이 건강관리 비결이었다.


 "많이 걸으니까 건강해요. 그리고 뇌를 많이 쓰지."

독서와 사색, 사진에 대한 연구가 그의 뇌활동이다. 사진에 대한 연구엔 다른 작가들의 사진을 계속 보는 것, 그가 찍은 사진들을 사진집 낼 주제별로 분류해 계속 좋은 사진들로 교체하는 것들이 포함된다. 그밖에도 신문이나 잡지에서 청탁한 원고 쓰기, 대학에서의 강의까지 여느 젊은이 못지않은 왕성한 활동에 하루 24시간이 부족하다.




사진작가 최민식은
1928년 황해도 연안에서 태어났다. 1957년 일본 도쿄중앙미술학원 졸업 무렵부터 독학으로 사진을 익혔다. 그후 평생 '인간'을 소재로 한 사진을 찍어왔다.  
1962년 대만국제사진전에서 입선을 시작으로, 미국·독일·프랑스·영국 등 20여 개국 사진공모전에서 220점이 입상·입선되는 등 세계적으로 반향을 일으켰다.  
1968년 사진집 <인간> 1집을 낸 이후, 지금껏 13집까지 펴냈다. 현재도 활발한 사진활동과 함께 부산대와 인제대 등에서 사진학을 가르치고 있다. 
그러면서도 사진촬영 시간은 꼭 확보한다. 학기 중엔 강의가 있는 이틀 오후를, 방학 중에는 거의 매일 사진가방을 메고 나선다. 자갈치 시장, 용두산 공원, 인도, 네팔…. 그의 카메라 렌즈가 향하는 곳은 늘 가난한 이들이 숨쉬는 생생한 현장이다. 그는 지금도 기차로 30분 가는 거리까지는 거뜬히 걷는단다.



그에게 '사진이란 무엇인지' 물었다. 간단한 답이 되돌아 왔다.


"사진(寫眞)은 말 그대로 진실을 찍는 거지."

50여 년을 인간 내면에 담긴 진실을 좇아 굽은 길을 걸어온 그다.


"나는 행복해요. 원하는 것을 이루었으니까. 사진을 통해 세상과 감동을 나누는 삶 말야. 내 인생은 성공한 거지."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월간 <노동세상> 1월호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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