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소년을 만나는 사람들] ③ 오일화Ⅰ
청소년의 성장을 돕는 지역의 울타리, 성남청소년지원네트워크
2012. 7. 18
제갈임주(풀뿌리자치연구소 이음 연구위원)
* 인터뷰: 오일화(함께여는청소년학교 대표)
지금으로부터 10년 전, 성남 은행동의 한 공부방에서 몇 개월간 자원 활동을 한 적이 있다. 햇볕이 들지 않을 정도로 다닥다닥 연립주택이 붙어 늘어선 동네에는 아이들이 많이 살고 있었고, 인근 초등학교에서 보건교사로 일하던 필자는 날마다 “머리 아파요. 배 아파요.”하며 특별한 이유 없이 찾아오는 아이들의 머리를 짚어주고 말을 건네면서 그들의 고단한 삶을 조금씩 들여다보게 되었다. 부모와 떨어져 사는 아이, 물건을 던지며 싸우는 부모를 피해 학교로 나와 그저 머리 아프다는 말로 자신의 괴로움을 표현하던 아이, 뼈가 부러져 병원에 가야하는데도 병원비 걱정에 큰 병원 보내기를 주저하던 부모들, 옆집 할아버지에게 성추행 당하는 딸을 보면서도 어떤 조치를 취할 생각도 못해 “할아버지가 너 예뻐서 그러는 거야”라고 다독이던 부모, 아이들을 귀찮아하며 독설을 퍼붓던 여교사와 성희롱을 일삼던 남교사. 인권이라고는 도무지 지켜지지 않는 참으로 척박한 토양에서 살아가는 아이들의 삶을 더 가까이서 보고 싶은 마음에 근처 공부방의 문을 두드리게 되었고, 그 곳에서 오일화 대표를 처음 만났다. 은행동의 작은 공부방에서 시작해 현재 <함께여는청소년학교>를 운영하기까지 동네 아이들과 지내며 발전해 온 오일화 대표의 고민의 발자취를 따라가 보는 길에 여러분을 초대하고자 한다.
'밥 숟가락 하나만 더 놓자' 하고 시작한 공부방
지역신문사와 법률사무소에서 노조설립을 지원하고 노동자를 돕는 일을 했던 오일화 씨는 결혼 후 성남 은행동에 자리를 잡았다. 성남중에서도 가장 슬럼화 된 동네로 손꼽히는 은행동에는 사회운동을 하던 사람들이 여럿 살고 있었는데 그 중 한 선배가 어느 날 이런 말을 했다. “사회가 병들어 있는데 내 아이 하나 잘 키워봐야 뭐하겠어. 이왕 우리 애들 키우는 거 조금만 힘내서 같이 키우면 좋겠다.” 이 말을 듣고 난 오일화 씨의 마음이 선뜻 움직였다. ‘그래, 어차피 애 키우고 밥 차리는 건데 밥숟가락 하나 더 놓으면 되지.’하고 단순하게 생각하기로 했다. 그 길로 같은 동네 사는 후배 정경미 씨와 5백만 원씩 출자해 작은 방을 얻어 공부방을 열었다.
(공부방에서 지낸 이야기, 주민과 함께 한 철거투쟁, 혁신적인 공교육 모델을 개척한 남한산초등학교의 운영위원으로 지낸 이야기는 모두 통과한다. 글이 한없이 길어질 것 같아 <함께여는 청소년학교>와 지역 네트워크를 중심으로 기술하겠다.)
따뜻하게 돌보면 될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아이들의 행동을 모두 이해하기는 어려웠고 공부가 필요하다는 생각에 치료사 공부를 시작했다. 성남에서 서울 마포까지 2년 넘게 다니며 한겨레 문화센터의 아동미술교육과정을 마치고 대학원에 입학해 예술치료사 공부를 하면서 비로소 아이들이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궁금해졌다.
이 아이들은 커서 어떤 청소년이 될까?
탈학교 청소년의 대안학교인 <수서디딤돌학교>에서 2년간 자원활동을 했다. 수서복지관이 이 대안학교의 위탁운영을 종결할 시점에 학교 문을 닫아야 할지 고민하는 교사들에게 오일화 씨가 제안을 했다. 성남이야말로 학교밖 청소년 문제가 심각한 곳인데 성남에 들어와 학교를 열면 어떻겠냐고 말이다. 공간을 마련할 돈을 걱정하던 교사들에게는 “돈이 필요해? 그럼 모으면 되지.”라며 안심을 시켰다. 해야 할 일 앞에서 복잡하게 생각하지 않는 오일화 씨의 추진력은 이 순간에도 발휘되었다.
본격적으로 학교밖 청소년을 만나다
공부방은 정경미 씨에게 맡기고 디딤돌학교를 서울에서 성남 태평동으로 옮겨 전임교사로서 본격적으로 탈학교 청소년을 만났다. 디딤돌학교에 오는 학생들 대부분 고등학생 나이에 검정고시를 준비하는 친구들이었다. 이들과 지내며 오일화 씨는 그동안 몰랐던 사실을 새롭게 깨닫게 되었다. 아이들 대부분이 처음 갈등을 겪는 시기는 중학교 1학년 4월, 중학교에 들어가자마자 거대한 학교 시스템에 적응하지 못하고 방황하다가 결국 1, 2학년 때 학교를 나온다는 사실이었다. 그렇게 나와 2, 3년 밖으로 돌다가 찾아오는 아이들의 모습은 이미 사회 물이 들 대로 들어 있었다. 그러나 학생들은 하나 같이 학교로 돌아가고 싶어 했다. 만약 중학교 시절 누군가 곁에서 함께 의논하고 도움 줄 사람이 있었다면 학교를 이렇게 그만두지는 않았을 거라고 했다. ‘그럼 아이들을 빨리 만나면 되겠네. 중학생 시기에 만날 수 있는 준비된 조직이 있으면 이렇게 힘든 지경까지 이르지 않았겠다.’는 판단을 한 오일화 씨는 ‘1318해피존 사업’에 신청을 했다. 선정된 스무 곳 가운데 한 곳, 학교밖청소년을 위한 지원을 성남 <1318모람아지트>에서 받게 되었다.
<디딤돌학교>가 고등학생 또래가 다니는 곳이었다면 <1318모람아지트>의 대상은 학교를 다니지 않는 중학생이었다. 아이들이 돌아가고 싶어 한 곳이 학교였기 때문에 학교 복귀를 돕는 것에 목표를 두었다. 모람아지트 사업을 할 거라고 지역에 소문을 내고 얼마 지나지 않아 한 어머니가 찾아왔다. 상대원동 현장에서 노동운동을 했던 분으로 결혼하고 아이도 낳았는데 아이가 크면서 관계를 어떻게 풀어야 할 지 몰라 속앓이만 하며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순간 오일화 씨는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묘한 기분이 들었다. ‘우리가 그토록 사회와 노동운동에 대해 이야기하면서도 정작 우리 자신의 삶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나눈 게 없었구나.’하는 생각이 가슴을 때려 당장 아이를 만나보겠다 말씀드렸다. 아이는 보호관찰과 재판이 진행 중이었다. 문제를 해결하는 모든 과정에 오일화 씨가 함께 했고, 신뢰가 형성이 되자 아이가 털어놓았다.
“선생님, 제 주변에 애들이 열댓 명 되는데요, 다 학교 안 다녀요.”
“그래? 다 데려와.”
그 친구 하나로 인해 갑자기 이십 여명이 들어왔다. 24시간 풀대기 상태로 헌신적으로 아이들을 돌보았다. 밤 12시에 집에 찾아와 재워달라면 재워주었다. 새벽에 경찰서에서 전화가 오면 곧장 뛰어갔다. 제 아이 키우랴 이놈들도 돌보랴 결국 모람아지트 위층으로 집을 옮겼고 밤낮없이 씻기고 먹이고 재우면서 집과 모람아지트를 오르락내리락 하며 그 시절을 보냈다.
가진 에너지의 몇 배를 쓰고 나니 몸이 아프고 정신적으로도 많이 지쳤다. 모람아지트 사업을 디딤돌학교에게 그대로 넘기고 오일화 씨는 나왔다. 그러면서도 계속 맴도는 고민이 있었다. ‘아이들이 학교를 나오지 않게 하는 방법은 없을까? 나오더라도 준비해서 나오게 하는 방법은 뭘까?’ ‘예방’이란 화두가 머리에서 떠나지 않을 때, 이우학교의 <함께여는 교육연구소>에서 성남 아이들을 위한 일을 같이 해보자고 제안을 했다. 성남 등지에서 한때 노동운동에 몸담았던 사람들이 참여해 만든 이우학교와 연구소 사람들은 성남에 대해 깊은 애정을 가지고 있었다. ‘귀족학교’, ‘부자들이 다니는 학교’ 등 이우학교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부정적인 시선에 불편해하던 이들은 평등교육 실현의 일환으로 ‘우리 성남의 아이들’-이들은 이렇게 표현한단다-을 위한 프로젝트를 기획한다.
학교와 지역의 변화를 꿈꾸며
먼저 중등 지역아동센터인 <함께여는 청소년학교(이하 함청)>를 열었다. 그리고 인근 중학교와 초등 지역아동센터, 함청과 같은 청소년 공간, 아이들의 성장을 돕는 문화예술단체를 묶어 <성남청소년지원네트워크>를 구성했다. 초기 7개 기관․단체의 결합으로 시작된 네트워크에 현재는 30개 단체(지역아동센터18, 학교7, 문화예술단체2 등)가 들어와 있다. 학교는 아이들과 기관을 연결해주고, <함께여는 교육연구소>는 지역사회의 후원을 조직해 네트워크를 지원한다. 네트워크로 연결된 청소년 기관들은 동아리 활동, 학부모 모임과 가족 나들이, 교사학습 프로그램을 공동으로 진행한다. 고학년을 통합해 여름 캠프도 떠난다. 단체가 협력해 기획하고 일을 진행하는 과정은 실무자들에겐 성장의 기회가 된다.
행사 기획만 같이 하는 것이 아니다. 길게는 학교와 지역의 변화를 지향한다.
“애들 말로 학교는 10프로만을 위해 존재하지, 자기네들을 위한 학교가 아니래요. 저희는 학교에 돌려보내려고 이렇게 애를 쓰는데 애들 말대로라면 저희가 뭐 하러 이 짓을 하겠어요? 그렇다면, 아이들이 살아가는 학교를 좋게 바꾸는 책임도 저희에게 있는 거죠. 10년 동안 노력하고 안 되면 학교를 깨는 운동에 앞장서자고 서로 얘기했어요.”
학교에 대한 정보는 아이들로부터 흘러나온다. 어느 학교에 심각한 문제가 있다면 그들이 전하는 이야기를 지역의 인적 연결망을 통해 학교와 교육청에 전달하고 개선하도록 한다. 동네마다 아이들끼리 만든 작은 축구 클럽들이 많다는 말을 듣고는 체육회와 시설관리공단에 체육공간의 개방을 요구했다. 문화재단에서 운영하는 문화클럽과 공모사업에는 청소년 참여의 물꼬를 틔워 지역과 아이들 사이에 다리를 놓았다. 이렇게 스스로 제기한 문제가 받아들여지는 과정을 통해 아이들의 자부심은 자라나고, 지역과 만나면서 얻게 되는 새로운 경험은 아이들의 자산이 된다. 네트워크는 이러한 과정을 뒷받침한다. ♣
(Ⅱ부-함께여는 청소년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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