公益人間/쓴 글

여성주의와 의료생협의 만남

제갈임주 2014. 3. 27. 14:14

여성주의와 의료생협의 만남 <살림의료생협>

 

 

 제갈임주 (풀뿌리자치연구소 이음 연구위원)

* 인터뷰 : 유여원 (2012. 1. 11)

 

 

  전국의 ‘의료소비자 생활협동조합(이하 의료생협)’은 220여 곳, 이 중 대부분은 무늬만 의료생협이다. 3백 명의 출자자와 3천만 원의 출자금을 모으면 의료인이 아니어도 병원을 개업할 수 있는 「생활협동조합법」을 악용해 설립한 영리 목적의 유사의료생협들인 것이다. 그러나 이 중에는 협동조합의 원리를 제대로 구현하는 곳도 있다. 1994년에 최초로 설립된 안성의료생협을 포함하여 인천, 안산, 대전, 서울 등지의 열다섯 곳 의료생협은 지역주민과 의료인이 주체가 되어 마을 병원을 세우고 건강과 의료의 문제를 함께 해결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오늘은 그 중 하나인 <살림의료생협>을 소개하려 한다. <살림의료생협>은 4년의 준비기간을 거쳐 올해 여름 서울의 은평지역에서 병원을 개원할 예정이다.

  하나의 의료생협이 만들어지는 데는 저마다의 사연이 있다. 안성의료생협은 대학생들의 7년간 농촌진료활동의 결과물로 만들어졌다. 인천의료생협은 공단 지역인 인천에서 산업재해와 직업병을 다루고, 보건예방사업을 꾸준히 펼친 ‘평화의원’이 있었기에 설립될 수 있었다. 살림의료생협(이하 살림) 역시 그만의 독특한 사연과 색깔이 있는데, 살림의 시작부터 지금까지 중심에 서 있는 유여원 씨를 만나 그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여성주의와 의료생협의 만남”

 

 

  이는 살림을 소개할 때 종종 인용되는 표현이다. 살림이 추구하는 정신과 운영방식을 집약적으로 나타낸 말이지만, 시작과정을 보면 오히려 이 말을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2008년, 여성주의 운동을 해온 한 활동가(어라, 유여원)와 의료생협을 꿈꾸던 한 의사(무영, 추혜인)가 만났다. 어라는 비혼 여성들이 행복하게 살기 위해서는 병원, 은행, 농장, 학교, 정당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했고 이러한 것들을 직접 만들고 싶은 마음을 갖고 있었다. 그 중 병원을 제일 먼저 선택한 데에는 무영과의 만남이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무영은 의료생협에 대한 꿈을 키우면서 동료들과 여성주의 의사모임을 해 왔다. 여성주의적인 병원을 만들고 싶은 욕구가 있었지만 의사들끼리 공부하는 것으로는 한계가 있었다. 기획가나 조직가가 필요함을 느끼고 있던 차에 두 사람은 <언니네트워크>라는 여성단체의 활동을 하면서 친해졌다. 마음이 통한 무영과 어라는 6개월간 남미 여행을 떠났다. 이 기간 동안 두 사람은 여성주의와 병원, 의료생협에 대해 얼마나 많은 생각을 나누었는지 모른다. 수많은 모래성을 쌓고 허물기를 반복하면서 서로의 지향점을 확인하던 시간들, 이 시간들은 지금의 살림을 있게 한 자양분이 되었다.

 

 

 

      ◎무영과 어라 (사진출처 : 여성주의저널 <일다>)

 

  

사람을 키우는 의료생협연대

 

 

  둘은 돌아와 각자의 일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무영은 일차의료기능을 중시하는 의료생협에 가장 적합한 가정의학과를 선택해 레지던트 과정을 밟았다. 어라는 의료생협연대(이하 연대)를 찾아갔다. 일단 지역의료생협에서 경험을 쌓는 게 좋겠다는 박봉희 선생님의 조언에 따라 2008년 겨울부터 서울 노원지역의 <함께걸음 의료생협>에서 실무를 익히기 시작했다. 지역주민과 함께 일하는 과정을 거치고 난 2009년 여름에는 다시 연대로 돌아와 여러 문제를 포괄적으로 보는 눈을 길렀다. 지역의료생협의 다른 사람들이 경험을 통해 스스로 배워나갔다면 어라는 연대가 키워낸 장학생 1호다. 이런 연대의 지원에 대해 어라는 높이 평가했다. “사업기획과 회계관리, 의료생협의 고민을 가까이서 볼 수 있도록 3년간의 훈련 기회를 주셨어요. 장기적인 전망을 가지고 한 사람을 믿어주면서 물심양면으로 꾸준히 지원한 연대의 지원이야말로 가장 협동조합다운 방식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2009년에는 대안적인 의료운동, 풀뿌리․공동체 운동에 관심 있는 무영과 그의 동료들 그리고 어라가 함께 모여 ‘여성주의 의료생협 준비모임’을 구성했다. 첫 해에는 협동조합, 의료생협, 지역에 관해 공부하는 데 집중했다. 2010년부터는 구체적인 사업을 벌여나갔다. 그 중 한 가지로, 한국유방건강재단의 지원을 받아 유방과 관련한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거리 캠페인을 하면서 사람들에게 여성의 가슴에 대해 떠오르는 이미지를 물어보면 대답은 세 가지 중 하나였다. 굉장히 섹슈얼한 이미지, 모유수유하는 강력한 모성애의 이미지, 유방암에 걸려 자신의 건강을 위협하는 두려움이 담긴 이미지가 그것이었다. 유방에 대해 다른 생각을 가질 수는 없을까 하는 바람으로 유방과 관련한 강좌, 유방건강에 좋은 요가, 유방 모놀로그, 그리고 자신의 정체성을 표현한 유방 사진전을 진행했다. 이런 사업들은 매달 ‘열린회의’에서 기획되었는데 매번 스무 명의 사람들이 참석할 정도로 참여의 열기가 높았다. 이들은 함께 공부하고, 소식지를 만들고, 사업을 하는 1년의 시간을 거치면서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의료생협은 지역에 뿌리를 두어야 한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살림의료생협의 살림꾼 어라(유여원).

 

 

“꼭 지역 기반 해야 돼?”

 

 

  은평지역은 20-30대 비혼 여성들의 거주율이 높은 지역으로, 집값이 싸고 접근성이 좋기 때문에 여성민우회, 성폭력 상담소 등 여성단체 상근자들이 많이 살고 있다. 가장 먼저 살림의 조합원이 된 이들은 과연 ‘우리 힘으로만 병원을 유지시킬 수 있을까?’하는 현실적인 걱정을 하기 시작했다. 의료 기관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하루 최소한 수십 명의 환자가 있어야 하는데 그들은 너무나 건강했던 것이다. 또한, 의료생협은 이웃과의 관계와 소통이 원활할 수 있는 공간적 조건이 매우 중요하다는 사실을 체득하게 되면서 인근(홍대, 마포, 서대문)에 살던 조합원들이 하나둘씩 은평으로 이사오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꼭 지역 기반 해야 돼?”라고 말하던 사람들이 이사를 선택한 것은 ‘내가 사는 곳에서 뭔가를 해야겠다’는, 말보다 더 확실한 의지의 표현이었다고 어라는 회상했다.

  2010년 3월, 은평에 사무실을 마련하고 나서 주변의 시민단체를 먼저 찾아갔다. 당시 처음 만났던 <열린사회시민연합 은평시민회>의 최순옥 대표는 은평에 대해 너무 잘 알고 있었고 큰 애정을 가진 사람이었다. 그런 분이 이 지역에 의료생협이 꼭 필요한 이유와 잘해나갈 수 있는 근거를 이야기해주면서 함께 하고 싶다는 마음을 전해왔다. ‘아, 이런 사람들이 있는 동네라면 해볼 수 있겠다!’는 감동이 전해졌다. 최순옥 대표는 그 때 살림을 은평으로 끌어들인 죄로, 살림의 발기인 대표를 맡아 1년 동안 무척 고생을 했단다.

  2011년에는 월 1회 주치의 상담, 불광천 거리건강체크, 찾아가는 무료건강강좌 등을 통해 지역주민을 많이 만났다. 의료생협에 대해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지자체를 만난 것도 살림으로서는 행운이었다. 자원이 많이 필요한 의료생협의 사업을 아무런 외부자원 없이 해내기는 불가능하다. 흩어져 있는 자원을 의료생협을 통해 잘 흐를 수 있게 하는 것도 의료생협의 중요한 역량 중의 하나다. 지난해에 살림은 은평구청, 보건소와 함께 큰 프로젝트 사업을 진행했다. 지역주민의 건강을 바라는 공통의 목표를 가진 보건소는 의료생협의 좋은 파트너이다. 2011년은 이러한 외부 조건들이 맞아 떨어지면서 살림이 지역사회 속에 잘 자리 잡을 수 있었다.

 

 

기본을 놓치지 않는 살림의료생협

 

 

  2008년부터 시작해 적지 않은 시간이 흘렀다. 지난 2월에는 드디어 살림의료생협이 창립을 했다. 살림은 창립총회를 준비하면서 동일한 내용으로 일곱 번의 창립준비 설명회를 열었다. 빽빽이 늘어선 일정에 놀란 사람들은 “미쳤냐?”는 반응을 보이기도 했지만 330명의 조합원이 한 명도 빠짐없이 참여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실무자는 이 자리를 준비했다고 한다. 안건, 정관, 규약 등 익숙하지 않은 내용과 사업계획을 다루는 총회에서 조합원이 그 내용을 알아야 책임 있는 결정을 할 수 있기 때문이란다.

 

 

    ◎일곱 번의 설명회를 안내하는 웹자보.

 

  의료기관을 개원하면 여러 어려움들이 있을 텐데 걱정되는 점을 물어보았다.

  “의료생협은 우리나라 의료체계 하에서 운영되기 때문에 전체 의료체계의 공공성이 떨어지면 생협의 활동도 위축될 수밖에 없어요. 특히 장기요양보호사업이나 가정간호사업처럼 수익성은 별로 없지만 의료생협이 감당하는 역할들이 있는데 현 의료체계가 무너지면 더 이상 유지해나가기가 어렵죠.” 그래서 조합원들이 이런 사회적 변화를 볼 수 있는 눈을 갖게 하는 것도 의료생협의 중요한 역할이라 한다. 의료생협의 조합원 중에서 보수정당을 지지하던 사람들도 장기간 생협의 이사로 활동하다 보면 “난 000당을 지지하지만 FTA는 반대해.”라는 말을 하게 된다고 한다.

  또 다른 점은 없는지 묻자 어라는 협동조합이 일반적으로 겪는 위기에 대해 말해 주었다.

  협동조합이 겪는 위기에는 보통 순서가 있다고 한다. 처음에는 ‘신뢰의 위기’다. 이건 뭐지? 하며 아무도 믿어주지 않는 시기에 신뢰를 쌓기 위해 노력하다 보면 ‘경영의 위기’를 겪는단다. 그래도 원칙을 지키면 결국 파산을 하기도 한다. 이것을 막기 위해 기업적 마케팅을 도입하다보면 ‘사상의 위기’가 온단다. 영리기업과 무엇이 다른지 알 수 없는 상황에 봉착하는 것이다. “저희는 이 많은 위기가 동시에 혼재해 있어요. 이 위기를 해결하는 길은 결국 조합원 교육밖엔 없는 것 같아요. 여럿이 결정하고 함께 책임지면 실수를 해도 다음 기회가 올 때까지 같이 버틸 수 있잖아요.”

 

 

두고 갈 수 없는 질문 한 가지. 여성주의.

 

 

  마지막으로 미뤄두었던 한 가지 질문... 

  여성주의. 이 생소한 단어의 의미를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저희가 여성주의 의료를 열심히 고민하면서 정리한 몇 가지가 있어요. 첫째는, 여성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진료, 이것이 저희가 할 여성주의 의료예요. 그 농담 아세요? 중년 남성이 심장이 아프다고 하면 심장내과로 보내고, 중년 여성이 심장이 아프다고 하면 정신과로 보낸다고요. 여성의 고통을 실존하지 않는 것으로 받아들이는 의료인의 태도는 결국 문화적인 문제거든요. 환자의 말을 귀 기울여 듣고 그 바탕위에서 진료를 하는 것이죠. 둘째는, 오랜 시간동안 여성들이 건강을 담당해왔다는 사실을 존중하는 일이예요. 약을 제 시간에 챙기고 바람직한 식습관과 생활을 독려하고 건강이상이 의심될 때 발견하고 말해주는 일들은 오랫동안 여성이 한 역할이잖아요. 이런 여성들은 의료에서 중요한 파트너이고 숙련자라는 사실을 부각해야 한다는 이야기를 많이 나눴어요. 셋째는, 차별에 저항하고 평등한 의료를 실천하는 거예요. 마지막으로, 공동체를 지향하는 의료가 여성주의 의료라고 정리했어요. 내가 돈이 많아 대형병원 1인실에서 관리 받는다고 건강한 것일까요? 이웃과 서로 건강을 챙겨주고 함께 실천하는 가운데 자기 건강을 향상시키는 방식의 공동체 의료가 여성주의 의료라고 보는 거죠.”

 

  이런 가치들과 ‘여성’이 연결되는 지점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여성주의가 반대하는 것이 남성이 아니듯이 여성주의가 꼭 여성과 연결되는 건 아니에요. 오히려 가부장제나 권위주의, 성차별 제도를 반대하는 것이죠. 저희가 바라는 건강의 개념도 차별이나 피해가 없으면서 남성과 여성, 모든 생명이 평등하고 평화로운 관계에 있는 것이고, 의료체계도 그런 관계의 바탕 위에서 만들어져야 한다는 거죠. ‘여성주의’는 우리가 바라는 건강의 개념과, 우리가 무엇을 하면 좋을지를 잘 설명해주는 틀이라고 생각해요.”

  하나의 의료생협을 만들기까지 사람들이 들이는 공력이 너무 많기 때문에 의료생협의 대중화를 위해 좀 더 표준화된 계획과 모델이 필요하다는 의견들이 많다. 의료생협연대에서도 이와 관련한 연구와 고민을 많이 하고 있다. 그렇게 된다면야 더없이 좋겠지만, 어쩌면 한 조직의 생명력은 사람들이 끊임없이 함께 만들어가는 이야기에서 피어나는 것이 아닐까. 두 사람의 마음이 만나 시작된 살림의료생협이 지금은 420명의 조합원과 함께 하고 있다. 앞으로 더욱 늘어날 조합원들, 그들이 함께 짊어질 짐들이 살림의 미래를 만들 것이라고 확신한다.

 

  살림의 개원을 미리 축하한다! ***

 

 

 

* 참고

- 한국의료생활협동조합연대 홈페이지(http://www.medcoop.or.kr)

- 살림의료생협 인터넷카페(http://cafe.daum.net/femihealth)

- 임종한 외, 『가장 인간적인 의료』, 스토리플래너, 2011

 

 

<자투리 질문>

 

○ 조합원 구성

- 300여명 조합원 중 여성이 대부분을 차지한다. 남성은 10%.

- 지역 주민과 타지역 주민의 비율은 반반 정도.

- 조합원의 가족(혈연, 동거)도 조합원 혜택을 받는다.

 

○ 의료기관은 언제 개원하나?

- 2012년 8월에서 9월 사이 예정

 

○ 출자자와 출자금

- 현재까지 3천만 원의 출자금이 모였다. 한 구좌에 만 원, 기초생활수급권자인 조합원들은 만 원 정도의 최소한의 출자만 하고, 그 외 여유와 열의가 있는 조합원은 더 많이 냈다. 한 번에 목돈을 내는 사람은 아직 많지 않지만 매달 정기적으로 증좌하는 조합원은 많다. 조합원의 50% 이상이 매달 한 구좌 이상 증좌하고 있다. 1인당 평균 출자금액으로 따지면 현재까지는 1인당 십만 원 정도이다.

 

- 3백 명과 3천만 원은 넘었지만 일차 의료기관을 개원하는데 4-5억의 비용이 들 것으로 예상한다. 대대적으로 증좌 캠페인을 하려고 한다. 그 과정은 돈을 모으는 것뿐만 아니라 어떤 병원을 만들고 싶은지 사람들의 의견을 모아가는 과정이 될 것이다.

 

- 목표액은 3천만 원을 제외하고 1억 5천만 원. 이 정도면 다른 의료생협에 비해서 굉장히 큰 목표치다. 협동조합법에 의하면 한 사람이 전체 출자금의 5분의 일 이상을 출자해서는 안 되니 몇 명의 거액출자를 기대할 수는 없다. 부족한 금액은 대출을 받아야 한다.